강의 후 누군가 찍은 사진을 보면서 생각한다. 내 모습이 타자의 시선에 의해 객관화되는 것을 보면 낯설다. 하지만 이 낯설다는 느낌은 나쁜 뜻이 아니다. 새로운 것을 찾아 나서는 이의 설렘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첫 사진 "항공기를 멈추는 수능시험"이란 말은 교육사유에도 한 꼭지 들어가 있고, 강의 때도 자주 언급하는 대목이다. 선발적 교육관의 대표적 양태인 수능시험을 외국 언론의 시각으로 정리하고 있다.
두 번째 사진은 요즘 내가 정리하고 있는 "질문이 있는 교실, 원형을 찾고 전망을 밝힌다"에서 가져온 것이다. "좋은 수업"이라 할 때 떠올리는 이미지는 모두 다르다. 달라야 하고 다를 수 밖에 없다. 어떤 공통의 모습으로 정형화되는 순간, 이미 그것은 좋은 수업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난 힐베르트 마이어의 좋은 수업에 대한 정의에 공감한다.
"좋은 수업은 민주적인 수업문화의 틀 아래서, 교육 본연의 과제에 기초하여 성공적인 학습동맹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의미의 생성을 지향하면서 모든 학생의 능력의 계속적인 발전에 기여하는 수업이다."(Hilbert Meyer, 2004)
여기서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것이 '민주적인 수업문화'라는 것이다. 몇일 전에 서울 일반고 질문이 있는 교실 직무연수 강사 워크숍 특강에서도 지적한 바 있는데, 종종 어떤 기법들의 조합에서 좋은 수업의 모습을 찾으려 하거나 학습효과가 충분하게 나타나는(주로 학생의 성취), 혹은 집중과 몰입으로 교사가 의도한 목표를 무난하게 달성하는 것으로 좋은 수업의 개념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수업의 효과를 말하기 전에 좋은 수업이 일어나기 위해 피해갈 수 없는 전제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민주적 수업문화'이다. 상호 합의된 수업규칙이 잘 작동되면 민주적 교실의 가능성이 다소 높아지긴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절차와 제도의 완비는 민주주의의 매우 중요한 요소이지만 이것이 곧바로 민주주의를 보장하지 않는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시민성'이다.
교사와 학생의 삶 속에 녹아든 민주적 시민성은 눈에 보이는 가시적 결과가 아니라 그 사람의 소양과 지성, 생활 양식으로 표현된다. 합리성이나 공정성 등이 민주적 절차로 얻어지는 것 같지만 여기에 심각한 함정이 도사리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만약 절차나 제도의 완비로 민주주의가 성숙한다면 직접, 비밀, 보통, 평등 선거제도를 채택하고 있는 나라들은 아주 고품격의 민주주의를 향유해야 하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절차와 제도 속에는 당연하게도 권력이 반영된다. 그래서 구성원의 합의로 만들었다는 '제도'는 누군가에는 유리하고 누군가는 늘 소외될 수 밖에 없는 구조에 합법성을 부여한다. 이 룰 속에서 패한 자는 고스란히 결과를 자신의 책임으로 떠 안아야 한다. 이것이 형식적 민주주의가 가지고 있는 함정이다.
수업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질문이 있는 교실"은 우리 교실이 지향해야 할 바를 간명하게 선언하지만, 몰아치는 수업이 될 수 밖에 없는 외적 조건, 교사-학생의 비대칭적 권력 관계, 학생-학생의 다른 문화적 기반, 그리고 인식주체 외부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지식을 찾아가는 재현과 상기의 방식에 터한 수업은 애초부터 민주적 소양을 충분히 발휘하기에 적절하지 못한 구조와 환경적 조건을 안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좋은 답을 찾아가는 소크라테스적 질문법 이상을 넘지 못한다.
질문이 있는 수업이 향하는 곳이 정해진 지식을 효과적으로 축적하는, 그리고 그 여정에서 이탈을 방지하기 위해 교사의 안내를 필요로 하는 개념이라면 이는 부분적 설명일뿐이다. 교사-학생, 학생-학생 사이의 차이에 주목하고 그들의 자유로운 호기심과 창의적 발현에 의거한 생성적 지식을 믿을 때, 질문이 있는 교실은 답을 찾아가는 방식의 고답적 수업이 아닌, 생성과 발현의 새로움을 추구하게 될 것이다. 학생들의 자유의지를 바탕으로 창조적 생성이 가능한 구조가 되려면 충분히 민주적인 교실생태계와 일상 속에 자연스러 붙어있는 민주적 소양과 문화를 체화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